최근 인기리에 방송 중인 MBC 예능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에는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송종국과 딸 지아가 출연하고 있다. “아이들과 출연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딸들이 워낙 별나서 힘들 것 같다. 데리고 갔다가 방송사고가 날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그는 “축구 선수 이동국은 항상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털어놓는다.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만큼 시기하고 헐뜯는 이도 많았다. “예전엔 그런 상황이 짜증 나고 원망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부정적이었던 시선을 바꿔가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돌아선 마음을 되돌리는 순간, 그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지지자가 돼줄 것이라 그는 믿는다. 월드컵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  | ▲이동국의 축구 인생에서 상처를 치유한 곳도 결국 그라운드였다.
축구 선수라면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2002년 한일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을 때도, 4년 뒤 무릎 인대 파열로 월드컵이 또 한 번 그를 외면했을 때도 그는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 중요한 득점 기회를 놓치며 ‘역적’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이동국에게 월드컵은 아직 풀지 못한 숙제다. 국가대표 선수로 수많은 국제대회를 치렀지만 유일하게 골을 넣지 못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2002년 월드컵에서 황선홍이 그랬듯 그도 마지막으로 명예 회복을 할 기회를 갖고 싶다는 바람을 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 그는 이제 비로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여유를 찾아가고 있다. 마음의 여유를 선물한 건 신기하게도 성공이 아닌 실패였다. 그라운드에서 상처받았지만, 축구화를 벗지 않고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곳도 결국 그라운드였다. 그는 “누군가는 축구와 인생이 닮았다고 하지만, 내겐 축구가 곧 인생이고, 인생이 곧 축구였다”고 했다. “남들은 성공한 축구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과정은 평탄치 않았어요. 부모님은 굴곡 많은 제 삶에 눈물 지으며 더는 고생하지 말라고 기도하셨어요. 하지만 제 인생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시련에 좌절하면 끝없이 추락하지만, 그걸 극복하면 고비마다 돌아볼 수 있는 멋진 훈장이 되니까요.” ‘봉동 청년회장’. 전북 현대 모터스에서 뛰고 있는 이동국에게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봉동은 전북선수단 숙소가 있는 지명이다. 최강희 감독이 스스로 ‘봉동 이장’이라는 별명을 지었는데, 그보다 젊은 그는 ‘청년회장’이 된 것이다. 그는 “20대에는 라이언 킹이라는 멋진 별명이 있었는데, 30대에는 청년회장이라는 구수하고 친근한 별명이 생겼다. 전북 팬들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 항상 감사하다”고 했다. MVP와 득점왕을 숱하게 차지한 그지만 프로로서 처음 찬 주장 완장은 그만큼 더 무겁다. 그의 책에는 좋았던 일만 쓰여 있지 않다. 미화시킨 에피소드도 없다. 찬찬히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연필로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적은 그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다. 그는 “내 삶을 말하는 데 올바르고 아름다운 일만 드러내는 건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선수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순간과 환희의 순간을 가감 없이 써내려갔다. “큰 욕심은 없고, 많은 분이 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기쁠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좋겠어요. ‘뭘 느껴라’라기보다는 ‘아, 이동국이라는 선수가 어떤 선수였지’라는 것 말이죠.” 최근 그에게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10만분의 1의 사나이’. 겹쌍둥이를 가질 확률이 그 정도로 낮아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올해 하반기면 네 아이의 아빠가 되는 이동국은 “책임감도 제곱이 됐다”고 했다. ■ 참고도서·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나비의활주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