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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세계여의사회 회장에 취임한 박경아 연세대 의대 해부학과 교수에겐 늘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다.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은 ‘모녀 해부학자’라는 것. 하지만 그가 연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이쁜이 역을 하고, 무대 위에서 부채춤까지 춘 끼 많은 아줌마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박 교수의 샘솟는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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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뽑는 ‘올해의 교수’ 상을 세 차례 수상한 박경아(63) 연세대 의과대학 해부학 교수의 별칭은 ‘학교 엄마’다. 평소 상담사를 자처해 학생들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외국 생활로 한국식 수업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멘토를 연결해주고,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처럼 교육자의 모범 같은 그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또 하나 있다. ‘모녀 해부학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해부학자인 나복영(89) 고려대 명예교수가 그의 어머니다. 박 교수는 8월 초 한국에서 열린 제29차 세계여의사회 국제학술대회 폐막식에서 세계여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해 이젠 ‘의사 외교관’ 임무까지 맡게 됐다. “처음 오는 사람은 해부학교실을 찾기 힘들어요. 장례식장 앞에 와서 전화주세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주차장 입구 옆 좁은 계단을 지나자 ‘해부학교실’이란 팻말이 보였다. 연구실 문에 ‘2006학년도 우수업적 교수상(교육 부문)’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문을 열자 잔뜩 쌓인 책더미 사이에서 박 교수가 얼굴을 내밀었다. “날씨가 더운데 시원한 것 좀 마시라”며 음료를 권하곤 활짝 웃었다. 그가 올해 회장에 취임한 세계여의사회는 여의사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했던 1919년 여의사들이 함께 모여 영향력을 키우자는 취지로 설립한 단체다. 현재 90여 개국 여의사들이 가입해 있다. 여의사 간 교류 외에도 개발도상국에서의 의료 봉사와 구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2010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여의사회 차기 회장 선거에서 만장일치로 당선돼 올해부터 활동하게 됐다. 임기는 3년이다. “여의사들이 네트워크를 이룬다는 건 중요해요. 최근의 치료 동향은 이렇다, 이런 부분이 중요하다 같은 정보를 꾸준히 업데이트하는 건 모두에게 중요하니까요. 조손 가정의 아이들을 돕고 봉사 활동도 지속해서 하고 있어요. 성폭력 피해 지원 매뉴얼도 여의사회에서 만든 거예요.” 회장 임기 동안에는 가입국을 늘리고 지속적인 후원를 하는 게 목표라고. “그동안 세계여의사회에 가입하지 못한 빈곤 국가를 돌아다니며 가입을 장려하는 트리거(trigger·방아쇠) 노릇을 할 거예요. 우리도 1956년 한국을 방문한 세계여의사회 회장이 가입을 권유한 덕분에 2년 후인 1958년 회원국이 될 수 있었거든요. 저는 회장이 되기 전부터 활동을 해왔는데, 동남아 국가들이 아직 가입하지 않았더라고요. 의료 취약 국가에서 진료 활동을 하고 백신을 나눠주는 등 의료 지원도 계속해야죠. 3년 전 한국여자의사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 필리핀에 해외 봉사를 갔는데, 현지의 열악한 사정에 깜짝 놀라 설 연휴마다 찾아가기도 했죠.” 해부학자 모녀의 평행 이론
박 교수의 남편 역시 의사(홍승길 고려대 명예교수)다. 명절 때마다 해외 봉사를 떠나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의사라 이해해주긴 하는데 같이 가는 회원들이 문제다. 제사 지내야 하는 회원들도 많고 해서 설 때는 피해야겠다 싶었다”며 “대신 회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 봉사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여름휴가를 이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회장 임기 동안 가정 폭력과 성폭력 희생자를 도와주고 예방 교육을 하는 등 폭력과 싸울 것”임을 강조했다. 그의 인생은 어머니와 일정 부분 ‘평행 이론’처럼 닮았다. 어머니처럼 의사와 결혼했고, 어머니처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재학 기간 6년 내리 총장상을 받았을 만큼 공부에 재능이 있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모녀 해부학자’ 앞에 ‘수석’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만 할 것 같았다. 또한 어머니는 한국여자의사회 3대 회장을, 딸인 박 교수는 25대 회장을 맡았다. 어머니 나 교수는 학창 시절 전쟁과 광복이라는 큰 사건을 모두 겪은 역사의 증인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 나 교수는 당시 여성이 갈 만한 학교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1942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가 해부학에 입문했다. 1947년 서울여자의과대학(현 고려대 의대)을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가 돼 1989년 정년퇴임 전까지 교수직을 역임했다. 나 교수가 재직 시절 해부학교실을 놀이터 삼아 드나들던 딸이 지금의 박 교수다. 박 교수에게 어떻게 어머니에 이어 해부학자가 될 생각을 했는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재밌으니까요”라고 말했다. “의대에 진학해서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더라고요. 당시 학교에 해부학 중에서도 신경해부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앞으로 이 과목을 공부해 해부학 교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적성이 맞으니까 결과도 그만큼 좋더라고요. 특별히 어머니께서 이 길을 강요하거나 만류하지는 않으셨어요. 순전히 재밌어서 제가 택했죠.” ‘해부학교실’은 굉장히 오랜 기간 공포물의 소재로 쓰였다. 시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해부하던 시신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다거나, 실습 중인 학생의 손을 붙잡고 늘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괴담이 드라마나 소설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지금은 해부학교실에서 실습할 일이 없지만 그는 “시신 해부가 무섭지 않느냐”는 물음에 “의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다”며 담담한 표정이었다. “해부학도 수업의 일부니까요. 물론 실습을 하다 보면 한 명 정도는 울면서 뛰어나가거나 기절하기도 해요. 저희 반에도 그런 학생이 있었죠. 그런 사람을 제외하면 다들 ‘죽은 자가 산 자를 가르친다’는 말처럼 경건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업에 임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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