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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헬렌 켈러. 청각장애를 극복하고 4개 국어를 정복한 김수림 씨에겐 이런 비유가 무색하지 않다. 시련을 이겨낸 그의 감동적인 인생을 다룬 책이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출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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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일본의 한 국제금융회사에서 법무심의관으로 일하는 김수림(40) 씨의 사연이 소개됐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모습만 보면 노력파거나 천부적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두 번 놀랐다. 김씨의 자전적 내용을 다룬 책 ‘듣지 못하는 내가 4개 국어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일본에서의 호평에 이어 한국에서도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웅진지식하우스)’라는 제목으로 4월 말 출간됐다. 일본에서 사는 김씨와 인터뷰는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어 전화 통화가 불가능했기에 이메일로 이뤄졌다. “20대 후반 우울증을 극복하려 재활 훈련을 겸해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떠났어요. 거기에서 여행의 매력에 빠졌죠. 3년간 30개국을 돌아다니며 방랑했어요. 다양한 국가, 각양각색의 친구를 만들었죠. 지금까지 살아온 파란만장하고도 엉망진창인 인생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모두 한결같은 반응이었어요. 충격을 받는 한편 용기와 의욕이 생겼다고도 했죠. 그러면서 ‘네 이야기는 많은 사람이 들으면 좋을 것 같으니, 나중에 꼭 책으로 내보라’고 조언해줬어요.” 그들은 김씨에게 용기를 얻었다고 했지만, 정작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로부터 살아갈 의욕을 얻은 건 김씨 자신이었다. 일본에서 지내며 ‘일본의 상식’에 얽매여 살아오던 그에게 세계 여행은 ‘상식’의 기준을 바꿔줬다. 김씨는 “지금보다 더욱 자유롭게 생각하고 즐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저처럼 장애가 있고 공부도 정말 못하고, 아무런 연줄도 없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게 강한 인상을 줬죠. 일본에서 처음 책이 나오고 한국에서도 책을 내고 싶다는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웅진에서 책을 내고 싶다는 내용의 열의 넘치는 편지를 보내주셔서 이곳이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련이 시련 같지 않았던 이유 그의 삶은 시련으로 점철돼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여섯 살 때 열병으로 청력 상실, 한국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한 왕따. 시련은 쓰지만, 그것은 때론 독을 품고 노력할 힘을 주는 촉매로 작용한다. 그는 “그 당시에는 ‘시련’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다. “순간순간을 필사적으로 사느라 시련이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확실히 제 인생에 ‘시련’은 가득했죠. 하지만, 하나하나 ‘클리어’해 나가면서 ‘할 수 없는 건 없다’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어요. 이 세상에서 무의미한 사건은 없거든요. 현재의 나를 만드는 데 필요했던 거라고 지금은 생각하고 있어요.” 부모의 이혼 이후 네 살 때 먼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일본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이끌려 열두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김씨. 어머니와의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갈등도 많았다. 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묻자 주저 없이 ‘어머니’를 꼽았다. “당시 여성의 몸으로 비즈니스에서 성공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장애가 있는 딸도 키워야 했고요. 어머니는 술집 장사에 매달리셨죠. 지금 생각하면 장애가 있는 저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어머니를 움직이게 한 것 같아요. 당시에는 일에만 열중하는 어머니에게 반발 심리가 들었어요. 언제나 지쳐 계셔서 상냥하게 대화하고 상의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 없었죠. 제가 살던 방은 가게 연회장 구석의 공간이라서 늘 떠들썩했어요. 공부할 환경도 아니었고, 다니던 고등학교도 좋은 곳이 아니라서 여러 가지로 울적한 마음이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죠. 그래서 어머니와 말다툼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제게도 그런 어머니의 근성과 행동력, 투지가 유전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4개 국어를 익힌 이유
4개 국어는 생존의 수단이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외하면 모두 한계에 부딪혀가며 습득했다. 일본어는 귀가 안 들리는데 일반 초등학교에 다니며 왕따에서 벗어나 살아가려고 필사적으로 배웠다. 영어는 장애가 있는 데다 돈도 연줄도 없는 자신을 지키고자 배웠다. 3년간 30개국을 방랑하며 여행하던 중 많은 친구를 만들고 인생을 더 즐기려고 선택한 언어는스페인어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직할지 진학할지 고민했어요. 취직한다고 해도 장애가 있고 성적도 나빠서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돼 있었죠. 대학에 진학한다 해도 졸업만 하는 것으로는 달라질 게 없었어요. 살면서 ‘무기’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어요. 귀가 들리지 않는 제가 엉망진창이기는 해도 일본어를 하는 데다 영어까지 할 수 있다면 가장 큰 무기일 거로 결론을 내렸죠. 어쩌면 어학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도 생각했어요. 아니, 그때는 그렇게 믿고 싶었죠.” 영어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죽기 살기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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